재작년 봄 '래생'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해준 '김언수' 작가의 첫 장편소설 '캐비닛'을 읽었다.
제 12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캐비닛이 사실상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셈이다. 당시 심사위
원들에게 만장일치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삼십여년 전에 관공서나 학교 교
실 뒷편에 흔하게 있었던 '캐비닛'. 흔하고 볼품없는 작은 것으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건 무엇
일까? 입에서 도롱뇽이 나오는, 가슴에 시계를 달고 있는, 휘발유를 마시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표지가 눈에 띈다.
1902년 5월 8일.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발생한 화산폭발로 인해 주민 모두가 순식간
에 목숨을 잃게 되었고, 운좋게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 - 감옥 - 에 있었던 죄수 '루저 실바리스'
만이 살아남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흐른후 그는 당시 마을을 묘사한 책을 한권 낸다. 그것이 진실
인지 아닌지는 그만이 알 수 있다. 그가 정신이 나가서 혹은 자신에게 죄를 씌운 사람들에게 복
수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인지 아닌지 말이다...
늘 그랬던 것 처럼 하루종일 하는일 없이 자리를 지키던 주인공은 우연히 회사 건물의 한 구석
에 네자리 비밀번호로 잠겨져 있던 캐비닛 13호를 딱히 할일이 없어 0000부터 시작해 매일 번호
를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그는 번호를 맞추고 캐비닛 속의 문서를 읽게 된다. 이
어지는 권박사의 호출. 그 속에는 일반인이 알아서는 안되는 특별한 사람(?) 들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계기로 그는 그런 사람들을 관찰하며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자신의 방 어딘가에 악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갑자기 몇시간에서부터 몇년을 잃어버리는 사
람들, 혹은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등 일반인이 들으면 그냥 과대망상에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그것들이 존재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게 된다. 책을 읽는 도중 '맨인블랙'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
실 외계인 역시 그런것들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던 것 같다.
소설 대부분은 그와 캐비닛속 문서에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에 대한 에피소드들로 이
루어져 있다. 주인공과 함께 그들을 만나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들도 평범한 우리 주변인들의 모
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당연하게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렇지 못해 자신의 본
모습을 숨키는, 평범함 속에 섞이기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 우리 모두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매우 신선하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한 것 같다.
조금은 갑작스러운 결말에 아쉽긴 했지만 중간중간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인 '베르
나르 베르베르'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진짜 같은 가짜(?)들의 진짜 이야기. '캐비닛'!